인간 마음에도 일종의 ‘셔터 기능’이 장착되어 있는건 아닐까요? 서로 마음을 열고 연대하는 것이 미덕 같아 보이지만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싶어요. 내가 힘들 때, 내 처지가 남보다 보잘것없다고 느낄 때 이 셔터의 센서기능이 특히나 더 빠르게 감지되는 것 같은데요. 사람들은 이 경우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외부와의 셔터를 재빨리 내려 버리기 일쑤입니다. 덕분에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이상 어릴 때처럼 쉽게 친구를 사귀지 못하게 되고, 오랜 친구와도 소원해지는 일들을 겪는 일이 늘어납니다.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을 맛보는 것도 이런 자기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이런 폐쇄적인 인간으로 ‘인간은 섬이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제 멋에 살던 <어바웃 어 보이>의 36세 독거남 윌(휴 그랜트), 잘나가는 작가이면서도 결벽증으로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멜빈 유달(잭 니콜슨), 야쿠자 출신이지만 할 일없이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키쿠지로의 여름> 속 전직 야쿠자 아저씨 키쿠지로(기타노 다케시)같은 남자들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데요. 더러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부유하기도 하고 재능이 있는 이들도 있지만, 이들 모두 어떤 이유로건 이들도 마음의 셔터를 닫고 까칠하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부류들이죠.
주변에서는 주로 ‘괴짜’라는 말로 치부해 버리게 마련이지만, 영화 속 이 ‘못난’ 남자들은 결국 원치 않는 만남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는데요. ‘감사하게도’ 이들의 평온한 생활에 돌을 던지고 자꾸 찾아오고 끊임없이 귀찮게 하는 존재들이 등장한다는 것이지요. 윌은 우울증에 빠진 엄마를 둔 12살 왕따 소년을 본의 아니게 도와주다가, 멜빈은 강도를 당해 낭패를 당한 옆집 남자와 아이가 아파 곤란에 처한 웨이트리스를 도와주다가, 또 키쿠지로같은 경우엔 얼떨결에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나선 옆집 소년의 보호자가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기만의 ‘룰’을 깨고 세상과 엮여 복잡하게 얽혀 버리게 됩니다. <어바웃 어 보이>에서 누군가를 돕고, 또 자신 역시 누군가를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윌이 건네는 마지막 대사 “마음의 문이란 건 한 사람에게 열리고 나면 다른 사람도 들락날락 거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이런 영화들이 우리에게 건네주는 궁극의 교훈이 아닐까 합니다.
<세인트 빈센트>의 구제불능 빈센트(빌 머레이) 역시 비록 초반엔 괴팍했지만 급기야 정이 들고, 결국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남게 된 앞선 캐릭터들을 단박에 떠오르게 하는 노인입니다. 첫 장면에서부터 이 남자의 꼬일대로 꼬인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는데요. 그는 8년째 은행대출을 받고 있는데다 이제는 잔고보다 더 인출이 많은 마이너스 통장 신세라, 계좌를 해지하려고 해도 은행에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몇 년째 청소한번 하지 않은 낡은 집과, 본인은 ‘빈티지’라고 부르는 덜덜거리는 캐딜락이 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입니다. 꽤 오랜 세월 일이 잘 안 풀린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성격도 삐뚤어질대로 삐뚤어진 노인입니다. 대출이 안되니, 은행창구 직원들에게도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기 일쑤고, 누군가 말이라도 붙일라치면 ‘그런 이야기는 됐고’하고 매몰차게 되받아치는 게 주특기입니다.
자, 이쯤되면 이 못말리는 노인을 ‘귀찮게’ 해 줄 예의 구세주들이 나타날 때가 된 듯싶은데요. 빈센트의 눈엣 가시 역할을 하는 건 옆집에 막 이사 온 꼬마 올리버(제이든 리버허)입니다. 올리버는 아버지의 외도로 졸지에 싱글맘이 된 엄마와 함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참인데요. 하필 이삿짐센터 직원의 실수로 이사 오는 날 옆집에 사는 빈센트의 울타리와 캐딜락을 부시게 되고 이들 사이의 ‘악연’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일이 좀 재밌게 돌아가는데요. 직장에 나가있는 동안 올리버를 돌봐줄 사람이 없자, 빈센트가 ‘베이비시터’ 역할을 자처하게 되는 것이지요. 공짜는 아니고, 시간당 12달러의 비용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빈센트, 올리버의 관계는 가면 갈수록 ‘비정상’ 투성이인데요. 인생의 쓴맛을 겪은 빈센트가 아무래도 보통의 어른들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지요. 아이를 데리고 경마장에 가서 베팅을 하는가하면, 비록 콜라를 주문해지주긴 하지만 바에 데리고 가지를 않나, 친구와 싸우는 올리버를 보고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싸움의 기술을 알려주는 식입니다. 빈센트의 생각에는 방어의 기술은 ‘이 나라는 자신을 방어할 줄 모르면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습득해야 하는 요소이자, 베팅은 비록 도박이지만, 인생에 필요한 ‘리스크 관리와 올인의 개념’을 배울 수 있으니 조금 한다고 손해볼 게 없다는 식이지요. 물론 다른 어른들의 눈에 그런 변명이 통할리가요.
그런데 이쯤에서 영화의 제목이 좀 아이러니하다 싶은 생각이 들텐데요. 빈센트라는 그 못된 노인의 이름 앞에 ‘Saint(성인)’이라는 수식어가 말도 안 된다 싶은거죠. 비난에 앞서 한편으로는 이 남자의 망가진 현재만 보지 말고, 좀 더 사연을 들어볼 이유가 생기는 지점입니다. 사채업자에게 쫓기고, 경마에 올인 해 요행수를 바라고, 술에 절어 온전한 정신으로 지내는 날이 얼마 없는데다, 주위에서는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폐인인 빈센트는 사실 8년 동안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내를 위해 헌신해 온 좋은 남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최고의 요양시설에 있게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모든 걸 탕진하고도 안간힘을 쓰는, 아내에게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존재인 것이지요. 아이를 문제아로 만들까봐 걱정한 올리버의 엄마가 한번은 그의 행동을 비난하자, 빈센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에 대해 알아요?” 아무도 가까이 자기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까칠한 빈센트가 남몰래 숨겨온 고통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데요.
사실 재정적으로 곤란에 처한 빈센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들은 이야기는 “상황이 그런걸 어쩌겠어요?”라는 말입니다. 은행의 대출창구 직원은 규정을 들어 그에게 이제 더 이상 대출을 해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며, 요양원의 사람들 역시 돈을 더 이상 지불하지 않는다면 안타깝지만 더 이상 아내를 돌봐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과 담을 쌓은 듯한 빈센트는 사실 이민자 출신에 가난한데다 임신까지 한 스트리퍼 여성을 조건 없이 도와주며, 올리버를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표현방식대로 돌봐주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빈센트의 속마음을 아는 건 기특하게도 어른들 보다 어린 올리버였는데요. 그는 빈센트를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학교에서 ‘우리 주변의 성인’을 찾아보라는 과제를 내주자 그의 숨겨진 일면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바로 사회적인 성공이나 지위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어른의 사교방식 대신, 마치 어린 시절 우리가 친구를 사귈 때의 호기심만으로 빈센트를 바라보는 올리버의 시선 덕분인데요. 올리버는 아직 어리고 그는 관습적으로 타인을 규정하는 어른들 방식의 프리즘을 가지지 않은 깨끗한 눈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였던 것입니다. 소년의 이 순수한 접근은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병든 아내에게만 인자한 웃음을 보여주며 쓸쓸하게 살아가는 빈센트를 결국 세상 밖으로 끌어내주는 역할을 진정한 친구의 역할을 해냅니다.
<세인트 빈센트>는 제작자들에게는 가장 탐나는 시나리오를 일컫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로 통했던 시나리오이기도 한데요. 좋은 시나리오와 함께 이 영화를 빛나게 해준 일등공신은 연륜있는 연기로 빈센트의 다층적인 캐릭터를 소화한 빌 머레이와 처음 영화에 출연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 당찬 연기를 선보인 아역배우 제이든 리버허의 호흡입니다. 엄청난 나이 차를 극복한 두 남자의 우정을 지켜보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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