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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말하는 채권시장



1800년대에 발표된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기억하시나요? 전세계 10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될 만큼 유명한 동화인데요. 이 이야기는 최고의 옷만 찾는 허영심 많은 한 임금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무지와 잘못된 통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200년 전의 이야기는 오늘날 금융시장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데요, 함께 살펴보실까요? 




▶ 잘못된 정보가 임금님의 옷을 벗기다


한 나라에 허영심 많은 임금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옷에 허영심이 많았죠. 이 임금이 얼마나 남다른 옷을 원했는지 모든 신하들이 비위 맞추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재봉사들이 나서길 꺼려했는데 어느 날 한 재봉사가 세상에 둘도 없는 옷을 만들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이 옷은 아주 특별한 옷으로, 멍청하거나 무능한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옷’이라고 했지요. 임금은 귀가 솔깃했습니다. 아마 무능한 신하들을 잘라버릴 무기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죠.

드디어 재봉사가 옷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눈에는 옷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무능하다는 게 들통날까 봐 오히려 훌륭한 옷을 만들어줘 고맙다며 재단사를 칭찬하며 금은보화까지 부었습니다. 신하들도 옷이 보이지 않았지만 무능하게 보이면 쫓겨날 게 뻔하기 때문에 옷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옷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임금은 이 옷을 자랑하기 위해 의기양양하게 벌거벗은 채 거리에서 행진까지 했죠. 어른들은 벌거벗은 임금을 보고도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며 진실을 외치자, 사람들이 수근 거리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왕도 이 사태의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 그리 어렵지 않죠? 안데르센은 이 우화를 통해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세태를 꼬집은 것이었습니다. 


20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그 교훈은 바로 지금, 현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요? ‘불편한 진실’이라는 표현을 이용해, ‘불편한 교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교훈은 동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술적으로도 이용되고 있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The Emperor's New Clothes)’이란 어구는 학문적으로는 논리적 모순을 설명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죠. 또 심리학에선 집단 구성원 대부분이 마음속으로는 어떤 규범이 잘못됐다고 부정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규범을 수용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다원적 무지’라는 용어를 설명하는 사례로 꼽히기도 합니다.





▶ 대중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투자의 세계에도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상품이 있습니다. 바로 채권입니다. 오래 전부터 투자 전문가들은 ‘채권=안전자산’이라고 했고 ‘주식=위험자산’으로 분류했습니다. 채권은 만기까지 기다리면 원리금을 주니 안전하다고 했고, 주식은 언제 투자자금을 회수할 수 있을지 모르니 위험하다고 본 거죠. 대부분 교수들조차 아무 비판 없이 이 논리를 그대로 가르쳤고 시장의 전문가들도 생각 없이 그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세뇌가 됐는지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채권 값이 급락했는데도 아직도 채권, 특히 미국 국채를 안전자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채권시장이 변하기 시작하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그 ‘잘못된 상식’이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까지 흔들고 있습니다. 얼마 전 월가에서 최대 자산운용사로 꼽히는 핌코의 엘 에리언 CEO가 회사를 떠났습니다. 핌코가 얼마나 대단한 회사인지는 자산규모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014년 3월말 핌코가 운용하는 자산은 1조 9400억 달러로 한국 GDP의 2배에 육박하고, 2월말 기준 433조원인 국민연금 자산의 네 배가 넘습니다. 엘 에리언은 미국 발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에 ‘뉴 노멀’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유명인사입니다. 그가 회사를 떠난 것은 아마도 그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겠죠.


뉴 노멀(New Normal)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표준으로, 위기 이후 5년~10년 간 세계경제를 특징 짓는 현상.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에 저성장, 저소비, 높은 실업률, 고위험, 규제 강화 등이 뉴 노멀로 논의 됨 

사실 핌코는 금융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엄청난 규모로 자산을 늘렸습니다. 미국마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채권은 안전자산’이란 논리를 내세워 세계 투자자들의 자금을 끌어 모은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엘 에리언이 채권이 너무 비싸졌다고 했는데도, 이 회사의 창업자이자 실력자인 빌 그로스는 계속 채권을 사들였습니다. 자신이 계속 채권을 사면 채권 값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본 것이죠.

그렇지만 현재 금융시장에선 빌 그로스가 막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융위기 때 경제를 살리려고 풀었던 돈을 거두려고 하자 금리가 뛸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죠. 채권가격과 채권금리는 반비례 관계로, 금리가 올라가면 채권가격은 떨어집니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핌코에 맡겼던 돈을 채권가격이 떨어지기 전에 빼내기 시작했습니다. 채권이 더 이상 안전자산이 아니란 게 알려진 것이죠. 비싸게 팔리던 채권가격이 내려가고 있으니 채권펀드에서는 손실이 날 수도 있습니다. 




▶ ‘채권=안전자산’?! 


사실 ‘채권=안전자산’이라는 공식(?)은 제한적 조건에서만 통용될 수 있습니다. 금리가 안정될 때, 만기가 짧은 채권에 적용할 수 있는 얘기죠. 대조적으로 만기가 30년 이상 되는 장기 채권을 비싼 값에 사면 손해 볼 가능성이 큽니다. 장기금리가 단기금리보다 높은 것도 그 때문이죠. 이런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실 채권을 안전자산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 잘못된 상식이 만연한 세태를 지적한 ‘벌거벗은 임금님


안데르센의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임금님과 사람들은 순수한 아이들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투자의 세계에선 무조건 채권을 안전자산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특히 미국 채권이나 달러화를 안전자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그런데 가끔은 그런 잘못된 분류가 투자자들을 잘못될 길로 인도하고 펀드 수익률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금융투자는 금융상품의 특성은 물론, 현재와 미래시장의 모습까지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단편적인 정보만 파악하면 잠깐은 임금님이 될지라도, 결국엔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대중들이 믿는다고 해도 그것이 올바른 정보인지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친 아이처럼 말입니다.






이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