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화폐 단위를 바꾸는 ‘리디노미네이션’이 또다시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5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리디노미네이션 관련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고 언급하면서 화폐개혁에 관한 관심이 촉발되었는데요. 논의가 뜨거워지자, 4월 18일 이주열 총재는 “리디노미네이션은 가까운 시일 내에 추진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는 잊힐 만하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이 무엇이길래 이슈가 되는 것일까요?
▶ 리디노미네이션 이란?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란, 화폐의 실질 가치는 유지하면서 액면가를 동일한 비율로 낮추는 화폐 단위 변경을 의미합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실행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로, 화폐단위에서 0을 몇 개 소거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현재 1,000원에서 0을 3개 줄여 1원으로 재설정하는 것이죠. 두 번째 방법은 화폐단위를 새롭게 지정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1,000원을 100전으로 정의하여 새로운 화폐를 정의하는 것이죠.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의가 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첫 번째 방법으로, ‘1000 : 1’ 리디노미네이션입니다. 1,000대 1로, 1달러가 1.1원이 되고, 커피 한 잔에 4천 원에서 4원, 치킨 한 마리가 15원이 되는 것입니다. 물가가 싸지면 좋겠지만, 월급도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니, 무조건 좋아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실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리디노미네이션은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이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화폐로 표시하는 금액이 점차 증가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계산, 지급, 장부 기재상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됩니다. 또한, 일부 선진국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국 통화의 대외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기도 합니다.
▶ 다양한 리디노미네이션 사례
우리나라에서는 두 차례의 리디노미네이션이 시행된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리디노미네이션은 1953년 2월 1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3호」를 공표하여 시행하였는데, 이 당시 전쟁으로 생산활동이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계속된 거액의 군사비 지출 등으로 인플레이션의 압력이 날로 커져, 통화의 대외가치가 폭락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화폐 액면 금액을 100대 1로 절하하고, 화폐단위를 圓(원)에서 (환)으로 변경(100圓 1)한 것이죠.
제2차 리디노미네이션은 1962년 6월 10일 「긴급통화조치법」에 의해 구(舊)권인 단위 화폐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고, 화폐 액면을 10분의 1로 조정한 새로운 ´원´ 표시 화폐(10→1원)를 법화로 발행한다는 내용으로 실행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퇴장자금을 양성화하여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투자자금으로 활용하고 과잉통화를 흡수하여 인플레이션 요인을 제거하는 목적에서 이를 시행했습니다. 이 조치는 경제적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현행 원화체계를 도입하였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외에도 전 세계에서 화폐개혁을 단행한 국가로는 터키, 베네수엘라, 짐바브웨, 북한 등이 있습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정치·사회·경제적 이유로 물가가 폭등하면서 기존 화폐가 교환의 매개수단 역할을 못 했고, 이에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습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성공적으로 단행한 나라는 터키인데요. 터키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와 초인플레이션의 여파로, 당시 직장인 한 달 월급이 2억 리라에 달했는데, 호텔 1박 비용만 1억 리라 수준이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 고액권을 지속적 발행, 2005년 1월 1일 화폐가치를 종전 대비 100분의 1로 낮춘 신 리라화를 발행하며 인플레이션을 극복한 것이죠.
▶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
리디노미네이션을 찬성하는 측은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사용자 편의성을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62년 현재 화폐 도입 이후 물가는 60배, 소득은 400배가 늘었는데, 화폐 단위는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에 ‘0’이 지나치게 많아졌고 불편한 수준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2017년 기준 국민 순자산은 1경 3817조5000억 원에 달하는 등 ‘경’ 단위가 통계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할 정도로 국내 통화단위가 높아져 있다는 것이죠.
또, 국가적 위상과 직결되므로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4자리의 화폐 단위를 사용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무역액, 외화보유액 세계 8위이고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는 우리나라는 1달러에 네 자릿 수 환율을 유지하는 화폐단위를 쓰고 있어, 거래에 불편이 있고 한국의 경제 위상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죠.
또 다른 찬성 의견도 있습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면 원화 가치 상승으로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억제되고, 거래 편의성이 증가하며, 지하경제 양성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요. 지하경제란 국가 규제나 세금 부과 등을 피할 목적으로 조성되는 '숨어 있는 돈'을 말합니다. 뇌물이나 도박 등 불법적인 과정을 거쳐 조성된 자금도 지하경제에 속하는데요. IMF에 따르면 2010년대 국내총생산(GDP) 대비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비중은 1.0%로 OEDC회원국 평균 15.3%보다 높습니다. 화폐단위가 변경되면, 새 화폐로 바꾸기 위해 숨어있는 지하경제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금고에 5만 원권 100억 원을 넣어두고 있는 사람이 5만 원을 대체할 500원 신규 화폐를 올해까지 은행에서 교환해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바꿀 수밖에 없죠. 이렇게 되면 보유 자금을 파악해 개인의 자산 과세 기준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문제가 될 만한 규모의 자금이라면 자금출처조사가 뒤따를 수도 있겠죠.
한편, 리디노미네이션을 반대하는 의견도 있는데요. 생활 물가 자극, 부동산 가격 상승 등 리디노미네이션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1,000원이 1원이 된다면, 800~900원짜리 물건은 0.8원, 0.9원이 아니라 1원에 수렴할 가능성이 크고, 이로 인해 생활 물가가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현물 가치, 대표적으로 부동산 가격 상승을 부작용으로 꼽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5억에서 5백만 원이 된 현금과 5억에서 5만 원 된 아파트가 있으면 아파트 보유자는 6천만 원으로 가격을 올려도 과거 금액으로 1억을 올린 셈이 되나, 체감상 백만원 올린 것과 같아, 심리적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화폐 단위가 컸을 때보다 가격 상승이 쉽게 이루어져 현물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용자 편의성에 의해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대부분 사람이 현금 대신 카드를 쓰기 때문에 계산상의 불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얻어지는 생활 속 편리함은 소소하지만, 사회적 비용은 막대하므로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일부 전문가들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는 분석을 했는데요. 신권 화폐 제조, 금융권의 현금자동입출금(ATM)기나 각종 자동판매기 교체, 그뿐만 아니라 전산시스템과 회계 컴퓨터 시스템, 국민이 화폐 개혁을 통해 느껴야 할 사회적 혼란 등 들어가는 비용을 숫자로 환산하면 천문학적 수치가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단기간에 리디노미네이션이 실현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높아진 물가만큼 화폐 가치도 하락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화폐단위 변경을 할 필요도 있겠지만, 그에 따른 후유증도 큰 실정입니다. 언젠가는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파급력이 큰 사항인 만큼 비용과 편익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고, 국민경제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