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슬란드의 풍광이 자꾸 눈에 아른거리는데요. 한번 가보지도 않은 곳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는 표현이 좀 맞지 않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눈앞의 갑갑한 일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커지니 부쩍 이미 여기저기서 보아온 그곳의 대자연을 동경의 시선으로 훔쳐보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 부추김에는 얼마 전 아이슬란드를 여행하고 온 지인의 추천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아이슬란드 관광 명소로 각광받는 거대한 굴포스 폭포에 다녀온 그녀는 “가까이서 보니 너무 두려워 뒤로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 위엄이 있는 곳이었다며, 꼭 한번 경험해 보면 좋겠다”며 추천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전긍긍, 복닥거리며 살아가는 우리 일상에서 한발 벗어나 볼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마침 TV 예능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 편의 촬영지로 각광받으며 최근엔 아이슬란드 여행을 하는 이들도 많아졌는데요. 그런데 아이슬란드도 역시 우리처럼 ‘사람 사는 곳’이었던 걸까요. 영화 <램스>는 북유럽하면 연상하는 하얀 설원과 낙농업을 하는 지역의 목가적인 풍경을 담고 있지만, 지금껏 우리가 ‘소비’하던 아름다운 관광도시에 대한 환상을 깨는 영화입니다.
▶북유럽 아이슬란드에서 살고있는 양치기 형제
<램스>의 배경은 아이슬란드 북부 지역, 이곳은 주민 대부분이 양 목장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지역입니다. 이 마을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법한 아주 독특한 형제가 살고 있는데요. 동생 구미와 형 키디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40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산 사연 많은 형제입니다.
동생 구미는 첫장면부터 양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내 사랑 루카’하고 애정공세를 퍼붓는데요. 둘 모두에게 늘 애지중지 먹이를 주고 씻기고 보살피는 양이,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 형보다 더 중요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이 마을에 스크래피라는 양에게는 치명적인 병이 발병하면서 부터입니다. 스크래피는 양의 뇌와 척수를 공격하는 바이러스로, 아직까지 별다른 치료책이 없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검역당국은 결국 감염위험에 처한 양들을 모두 살처분하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요. 양이 이 지역의 경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만큼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닌데요.
살처분에 대한 정부의 보상이 있다고는 하지만, 상황이 장기전에 돌입하자, 젊은 목축인들은 파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땅을 떠나겠노라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평생 양 목축을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온 형제에게 어떻게든 양을 지키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어 보입니다. 특히 구미와 키디는 늘 폭신폭신한 양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모습이었는데요. 이제 양들이 다 없어질 위기에 처하고, 또 춥고 지루한 북유럽의 겨울로 진입하게 되면서 한층 더 쓸쓸한 모습이 부각됩니다.
▶형제의 갈등을 불러온 양 전염병 ‘스크래피’
이 문제에 봉착해 형제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는데요. 무려 40년 간 팽팽하게 기싸움을 하던 ‘형제의 난’이 본격 궤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싸움이 가속화되면서 형과 동생의 성격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는데요. 형 키디는 동생 구미보다 더 고집불통인건 확실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검역당국에 동생 구미가 “키디의 양이 스크래피에 감염된 것 같다”고 고발한 것을 들어 앙심을 품고 있는데요. 덕분에 한밤중에 구미의 집 유리창에 총질을 하는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또 키디의 집이 동생의 명의로 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인데요. 고집불통인 키디가 검역당국의 결정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명의자인 동생 구미가 처벌을 받게 되니, 나서서 형을 설득해야 할 지경에 처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한마디 말없이 지내던 형제가 드디어 말을 하게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형제의 싸움을 지켜 보는게, 꽤 재밌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쓰나 싶지만, 원래 남의 싸움이라는게 밖에서 보면 어느 쪽에도 선뜻 손을 들어주기 힘들고, 또 한편으로는 조금 유치해 보이는 측면도 없잖아 있게 마련입니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 그리무르 하코나르손도 이 웃지 못할 상황을 블랙코미디 장르에 풀어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엔 양치기 개 소미가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말이 하기 싫으니 각자 할 말을 편지에 적어 소미에게 배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양쪽 집을 바쁘게 오가는 소미는 이 거간꾼 역할을 척척 수행하는데요. 소미는 무슨 죄인가 싶습니다.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다 싶은 일도 있는데요. 양을 잃고 그 괴로움에 진탕 취해, 눈밭에 쓰러진 형을 본 구미는 지게차의 삽에 형을 올려, 병원 앞에 툭 떨고어 놓고 갑니다. 차마 얼어 죽게는 놔두지는 못하지만, 또 그렇다고 적극 나서서 화해를 하기는 싫은 구미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40년 간이나 옆집에서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설정이 조금 억지스러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이런 이야기는 일부러 지어내기가 더 어렵지 싶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리무르 감독은 10살 때 아버지에게 어떤 이유로 40년 간 이야기를 하지 않은 형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영화의 캐릭터로 발전시켜 나갔다고 합니다. 바로 그 고집스러운 싸움에 아이슬란드인이 가진 특징과 정체성이 잘 드러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인데요. 그리무르 감독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강한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있고 매우 독립적이지만, 그래서 그만큼 고집스럽기도 합니다. 참으로 아이슬란드인다운 특징”이라며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렇게 아이슬란드의 정서를 담기 위한 노력은 영화의 배경에도 영향을 미쳤는데요. 그래서 잘 알려진 관광지가 아닌, 북부 지역에 있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마을을 촬영 장소로 삼았다고 합니다. 또한 3년 간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양 목축업을 하는 사촌 동생 뿐만 아니라 실제 이 일에 종사하는 이들을 조사하고 그 모습을 반영했다고 하니, <램스>는 우리가 잘 모르던 아이슬란드인에게 한발 다가가는 기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양을 둘러싼 형제의 ‘싸움’의 종장엔 어떤 결론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램스>는 해묵은 감정이 발아하고 마침내 해결책을 찾아가기까지의 그 긴 과정을 영화는 조바심 내지 않고 좇아갑니다. 그리무르 감독은 “<램스>는 결국 화해의 영화입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사람들은 결국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지요. 국제적 테러와 경제적인 위기가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처럼, <램스> 역시 인간의 화합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양 목장을 둘러싼 아이슬란드의 이 이야기는 그러니,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입니다.”라며 <램스>의 정서를 설파합니다. 지금 아이슬란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아이슬란드를 꼭 닮은 구미와 키디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