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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영화기자가 들려주는 영화 속 보험 이야기<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76년 연인, 노부부를 통해 깨닫는 사랑과 이별 이야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백년해로’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세상입니다. 막상 사귀지도 않으면서 ‘썸’만 타는 요즘 젊은 연인의 세태를 탓하자는 얘기가 아니죠. 부부로 백년가약을 맺고 서로 믿음을 가지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별 탈 없이 함께 자식들 키우고 여생을 즐기는 게 뜻대로 그리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사고 앞에서, 질병 앞에서 나약한 우리 인간들은 부지불식간의 내 평생의 짝을 잃을 위험노출된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노부부가 손을 잡고 다정히 걸어가는 풍경은 풍진 세월을 모두 지나온 것 같아 존경심에 가까운 아름다움이 느껴지곤 합니다.


강원도 횡성의 아담한 마을에는, 98세 로맨티스트 조병만 할아버지89세 소녀감성을 가진 강계열 할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 무려 76년 세월이죠. 14살에 어린 나이에 시집 간 강계열 할머니는 자식들을 하나둘 출가시키고 조병만 할아버지와 그렇게 둘이서 쭉 함께 해왔습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어찌 보면 아무렇지 않은 이 산골 노부부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카메라에 담아냈습니다. 연출을 한 진모영 감독이 TV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에서 ‘백발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던 노부부에게 영화에 출연할 것을 제안했고, 카메라 앞에서 용감한 할아버지가 흔쾌히 촬영을 허락해주셨습니다. 흥행작이면 으레 손꼽을 만한 스타 감독도, 스타 배우도, 특수효과도 없었는데요. 1억2000만원의 적은 제작비, 흥행코드 전무한 다큐멘터리가 ‘이변’이라는 말로 수식되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12월 28일 기준으로 355만 명을 넘었으니,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할리우드 영화 <비긴 어게인>의 343만 명을 제친 엄청난 수치라고 할 수 있죠. 


 



이 사랑이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젊은이들이 아닌 노부부에게 ‘사랑’이라는 표현을 써 본 적이 있었나하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드는데요. 그저 자식들 건사하고 생활에 급급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우리가 한번이라도 ‘낭만’의 시선을 주어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첫 장면을 보면서 그런 반성이 뒤통수를 쳤습니다. 함께 오래 살고 익숙해져 오히려 대면대면 한 노인들과 달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대 놓고’ 연애 모드 입니다. 슬레이트 지붕이 있는 작은 집. 낙엽이 잔뜩 쌓인 마당을 빗질하던 할아버지는 이내 잘 모아놓은 낙엽더미를 흐트러뜨리며 할머니에게 마구 던집니다. 이건 <러브 스토리>의 연인이 눈밭에서 뛰놀던 그 모습입니다. '아니 이게 뭐지?'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번에 그들의 사랑의 장소는 무대는 별채에 마련된 화장실로 옮겨 갑니다. "할아버지 여기서 내 동무 좀 해줘요. 어디로 당최 가시지 마요. 내가 무서워서 그래요. 노래도 좀 불러줘요.”하고 할머니가 애교를 부리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주문대로 화장실 앞에서 꼼짝도 않고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줍니다. 할머니가 춥지 않냐고 물어보면 “할머니 동무하는 게 뭐가 추워?”하고 반문하는 그토록 든든한 연인입니다. 



 


개울가에서 나물을 씻는 할머니에게 대뜸 돌을 던져 물세례를 맞게 하는 짓궂은 장난도, 겨울이 되면 눈사람을 만들며 보는 사람을 닭살 돋게 만드는 것도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순환하고 나이를 먹는 동안의 시간, 노부부는 이렇게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할머니의 생신날 자식들이 오고, 또 논쟁이 오가기도 하지만 그건 잠시 뿐이죠. 86분의 시간 동안 스크린을 수놓는 영화의 주요등장인물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부가 기르는 강아지 두 마리에 불과합니다. 감동을 조장하기 위해 마련될 법한 듣기 좋은 내러이션도 이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애정이 듬뿍 담긴 채 주고받는 ‘하오체’의 대화가 이 적막한 산골의 작은 집을 살아있게 만드는 유일한 사운드입니다. 


늘 그렇게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귀여워하던 강아지 ‘꼬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그 후 할아버지의 기력이 급격히 쇠하고 맙니다. 알콩달콩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집안은 어느새 폐가 좋지 않은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로 가득 차 버리는데요. 할머니를 웃게 해주려고 장난치던 할아버지는 아프고 나서부터는 평소의 유머를 잃게 됩니다. 거울을 벽에 거는 게 뜻대로 되지 않자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기도 하고,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잘 먹지 않고 맛없다 소리도 합니다. 눈에 띄게 해쓱해진 얼굴, 병석에서 거의 자리를 뜨지 못하고 병원을 오가던 날, 영화 촬영 15개월 만에 제작진은 할아버지의 임종을 아프게 기록해야 했습니다. 


평생을 곁에서 위해주며 살 것 같았던 동반자의 죽음. 할아버지의 병으로 로맨틱코미디 같았던 부부의 사랑은 기어이 슬픈 멜로로 장르를 바꿨습니다.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워진 걸 알게 된 할아버지는 "사람인생은 꽃과 같아. 꽃이 마냥 피어있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소. 하지만 나중에는 오그라들어서 시들어."하고 덤덤히 그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영화에서 그런 할아버지의 부재, 아픈 현실을 가장 단적으로 알려주는 건 노부부의 옷이었습니다. 할머니가 파란 치마에 하얀 저고리면 할아버지도 같은 색의 바지와 저고리를, 할머니가 자줏빛 치마에 노란 저고리면 할아버지도 같은 구성의 아래 위 옷을 입는 깜찍한 커플룩이죠. 어쩜 저렇게 예쁘게 맞춰 입었을까 감탄을 자아내던 부부의 맞춤 의상은 할아버지의 병세가 심각해지면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안 챙겨주면 겨울옷인지 여름옷인지 몰라요”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애달픈 소리와 함께, 그렇게 부부를 행복하게 해줬던 기억의 옷들은 할아버지의 저 세상 가는 길을 위해 불 속으로 내던져져 무참히 사그라들어 버립니다. 


 


할아버지의 임종 후, 눈이 소복이 쌓인 할아버지의 무덤 옆에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남은 옷가지를 태워 줍니다. 그리고 저승길에서 만나면 전해주라는 죽기 전 약속을 되내이며, 생전에 부부가 먼저 떠나보낸 여섯 자식들을 위해 마련한 내복도 함께 불 속에 던져 줍니다. 부부가 된 76년의 시간. 즐거웠던 순간도, 아팠던 순간도 함께 나누며 그 기억을 공유하며 대화하고 의지했던 유일한 벗. 세상에서 가장 서로를 아껴주던 존재가 훌쩍 떠났습니다. 심장을 파고드는 그 슬픔에 할머니는 말 합니다. “할아버지, 내가 빨리 가지 않으면 나를 데리러 와 줘요.” 극장 안을 가득 채운 눈물의 정체는 결국, 그들의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을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백년해로를 꿈꾸지만, 누군가를 먼저 앞세워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그 먹먹한 사랑의 소멸 앞에서, 우린 또 그렇게 떠난 이와의 추억으로 그 아픔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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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