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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알면 알수록 재밌는 역사속 세금이야기


최근 정부가 발표한 증세계획으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2,000원 인상 추진 중인 담배세의 경우 반대가 극심한데요. 그 외에도 주민세, 자동차세 인상 등 서민 증세논란으로 ‘세금’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소득이나 재산 또는 소비에 비례해서 내는 세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과거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희한한 세금이 있었답니다. 이번에는 모자세, 수염세, 창문세, 결혼세, 매춘세, 사망세, 전쟁세 등 역사 속 재미있는 몇 가지 세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자에게 세금 걷으려 고안된 모자세(Hat Tax)


모자세는 1784년부터 1811년까지 영국에서 남자의 모자에 부과했던 세금입니다. 당시 영국의 피트 내각은 부자들에게 가장 손쉽게 세금을 거둬 들이기 위해 이 세금을 고안했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단지 한 두개의 싼 모자만을 소유하는 것과 달리 부자들은 비싼 모자를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었겠죠?  특히 영국의 멋쟁이들은 인사를 할 때 모자를 살짝 든다 던지 하는 멋스러움을 지녔으며 모자를 격식과 예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처음에는 모자를 살 때마다 별도로 모자세를 지불해 증지를 모자 속에 붙여 사용했으나 이후 증지 대신 직접 소매상인들이 스탬프를 찍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4실링 이하의 모자에는 3펜스를, 4∼7실링은 6펜스를, 7∼12실링의 모자에는 1실링을 모자세로 내야 했으며, 12실링이 넘는 고가의 모자를 구입하는 경우 2실링의 무거운 세금을 지불해야만 했어요. 모자세를 내지 않는 부자들에게는 무거운 가산세를 물리기도 했으며 모자에 붙이는 증지를 위조한 자는 사형이라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다고 하니, 그 당시 영국에서 얼마나 모자세 수금의 의지가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죠?


오늘날 모자 안쪽에 브랜드 등을 금문자로 새기는 것은 과거 모자 속에 증지를 붙이거나 스탬프를 찍었던 데서 유래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1797년 런던에서는 한 양품점 주인이 당시 모자세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빛나고 높은 모자를 쓰고 거리를 다녀 화제가 됐는데 이 후 그 모자는 영국인들에게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 모자가 바로 우리가 지금 영국 신사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탑 헷'이랍니다. 


당시 피트 내각은 이 외에도 창문세, 머리염색약세, 벽지세, 장갑세, 향수세 등 다양한 종류의 세금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주었다고 합니다. 






근대화에 저항한 귀족들에게 부과한 수염세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 황제(1682∼1725)였던 표트르 대제(Pyotr I, 1672∼1725)는 러시아 절대주의의 확립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당시 러시아가 유럽에 비해 경제적으로 뒤쳐져 있다고 판단해 1703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항구도시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로서의 역할이 가능토록 만들었어요.


한편 표트르 대제는 신하들은 물론 자신의 긴 수염을 깎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유럽식으로 바꾸고,또한 귀족 부인들은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답니다. 그는 젊은이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고 유럽인을 초빙해 유럽의 문화와 기술의 도입에 힘썼어요. 하지만 귀족들은 권위있는 긴소매를 짧게 하는 것은 물론 슬라브인의 긴 수염은 하늘이 준 것이라며 이를 지키려는 저항을 계속했답니다. 


그는 수염을 자르는 것에 대한 귀족의 반대가 거세지자 수염을 기를 수 있게 하는 대신 ‘수염세’를 물리기로 결정했어요. 그러자 세금을 내기 싫었던 러시아인들은 의외로 소중하게 가꿔온 수염을 쉽게 깎아버렸고 이러한 러시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그는 ‘서방으로의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 발트해로 진출을 꾀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시 발트 해를 지배하던 스웨덴을 꺾어야 했던 표트르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또 그는 징병 제도를 마련해 사관학교도 세웠으며 세원 마련을 위해 인두세를 신설하기도 했어요.


이렇듯 ‘수염세’로 기억되는 표트르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러시아의 서구화와 근대화 정책을 성공으로 이뤄내 러시아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이후 ‘대제(the Great)’로 불리게 되었지요. 북방 전쟁 중 새로 수도로 삼았던 페테르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는 오늘 날에도 그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재산세의 시작, 햇빛도 포기하게 하는 무서운 세금 창문세(Window Tax)


창문세는 영국의 윌리엄 3세가 아일랜드 구교도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창문의 개수에 맞춰 부과한 세금으로서 유럽 각국에서 도입과 폐지를 반복했던 아주 유명한 세금입니다.


전에 존재했던 벽난로세(Hearth Tax)가 세금 징수를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가 조사를 하는 일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반발이 심해지자 폐지되고 그 대신 1696년에 창문세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세금을 피하기 위해 벽난로를 없앴던 사람들이 이제는 창문을 없애기 시작했고 신축 건물에는 아예 창문을 달지 않는 등 건물들의 외형이 기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당시의 세금은 어려운 서민들이 햇빛을 포기할 만큼 무서웠던 것이지요.


창문세는 부유층을 타깃으로 한 일종의 재산세로서 좋은 집은 창문도 많을 것으로 가정한 것이 과세근거가 되었습니다. 근대 유럽에서 부동산 크기와 세금을 연계한 첫 사례라고 볼 수 있으며 1851년 주택세가 도입될 때까지 존속했다고 하네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1789-1794)의 배경에도 창문세가 존재합니다. 루이 16세는 가뭄과 잦은 전쟁 등으로 나라가 어려웠음에도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미국 식민지인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었고 프랑스의 살림은 거의 파산에 이르렀어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거두어 들인 창문세 등의 과중한 세금은 급기야 시민계급의 반발을 가져와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프랑스는 창문의 갯수에 비례해 세금을 물린 영국과는 달리 창문 폭에 비례해 세금을 물렸어요. 실내 온기가 창을 통해 빠져나가므로 비싼 땔감 값을 부담할 수 있는 부자만 창을 넓게 낸다는 점에 착안한 것인데 이후 절세를 위해 창문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창이 유행하게 된 원인이 되었지요.


세균학의 발달로 좁은 창문이 세균의 확산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1926년 창문세는 사라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서양에서는 지금도 ‘세금을 더 거두려고 억지로 만든 세목’을 빗대어 창문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농노가 결혼할 때 영주에 받치던 세금 결혼세(
結婚稅, marriage tax)


결혼세는 영주가 존재하던 중세의 조세제도 중 하나입니다. 농노들이 다른 장원영주(莊園領主)의 지배를 받고 있는 농노와 결혼할 때 영주에게 바치던 세금인데 특히 결혼 후 다른 장원으로 떠나는 여자에게 부과되었습니다. 영주의 수입이 농노의 노동력에 의존했던 터라 이러한 손해를 보상하는 의미로 영주의 결혼허가에 일정한 금액을 지급한 것이에요.


한편 대 로마시대에는 결혼초야권(Ins primae noctics)이라는 법률이 있었는데 이 또한 영주가 과한 조세로서 결혼할 신부가 첫날밤을 영주와 함께 보내거나, 신랑이 세금을 내고 그 권리를 영주로부터 사들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실태는 잘 전해지지 않지만 16세기경의 고문서에 의하면, 11∼13세기경 실제 이 법률을 사용했던 봉건영주에 대해 파렴치한 자들이라는 비난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해요.


모차르트의 걸작 중 하나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백작의 하인인 이발사 ‘피가로’와 백작부인의 시녀 ‘수잔나’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서 바람둥이인 백작이 결혼초야권을 폐지한다고 밝혔다가 피가로의 약혼녀 수잔나를 보고 마음이 달라지는 등 결혼을 반대하는 갖가지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헤프닝입니다.





과거와는 달리 현재 미국에서의 결혼세(marrage tax)란 남녀가 결혼을 하면 세금이나 사회부담금이 늘어나는 부분을 일컫는 말로 변했어요. 예컨대 두 남녀가 결혼을 하기 전 직장을 다닌다면 각종 세액공제나 소득공제 등의 혜택을 개인별로 받았다가 결혼을 하면 세액공제나 소득공제가 줄어들기 때문에 세부담이 늘어나는 경우를 일컫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요.


지금까지 기상천외 하지만 그 당시에 존재해서 지금의 서민, 그 당시의 백성을 울렸던 별별 세금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세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반갑지 않지만, 국민으로서 납세의 의무는 지켜야 하겠죠? 다만, 다양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확실한 계획을 세워 절세방안을 찾아보는 것이 제태크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 본 칼럼은 ‘세무사신문’에서 기획한 ‘역사 속 세금이야기’의 기사를 참조해서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정원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