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

전에는 알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 <파더 앤 도터>


메마른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계절, 제 친구는 페이스북에 ‘날씨가 추우니 정서마저 바삭바삭 말라가는 것 같다’며 한탄을 하더군요. 이럴 때 일 수 록 그리워지는 것은 따뜻한 사연의 드라마 한편입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김이 모락모락 스며나오는 호빵을 찾게 되는 것처럼요. 일종의 마음을 위한 호빵이라 할까요?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의 영화 <파더 앤 도터>가 저에게는 따끈한 호빵 같은 작품입니다. 이야기가 복잡하지도 않지요. 제목처럼 정말 쉽게, ‘아빠'와 ‘딸'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파더 앤 도터>와 같은 영화는 익히 보아왔음직한 상투적인 장면들도 가득해 혹시 뻔한 감동이 아닐까 선입견을 갖게 되는 작품이기도 한데요. 저 역시 그런 의심의 눈길을 완전히 떨치지 않은 채 극장에 들어갔다는 걸 인정해야겠네요. 영화의 실제 분위기를 알려주는 단서는 다름 아닌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입니다. 이 분 대표작으로 윌 스미스와 그 아들 제이든 스미스가 출연한 <행복을 찾아서>를 기억하시나요? 


 

1980년대 경제난에 허덕이던 미국, 가난한 의료기기 외판원이 절망 속에서도 어린 아들을 지키려는 의지를 잃지 않고 노력해서 굴지의 투자회사 창업까지 이루는 기적 같은 실화를 토대로 한 감동적인 작품이었지요. 아메리칸드림을 미화한 작품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그 감동만큼은 확실했으니 이번 영화 <파더 앤 도터>의 관람에도 조금은 의지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파더 앤 도터>의 아빠 제이크(러셀 크로우)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매우 유명한 작가지만 딸 케이티(아만다 사이프리드)와는 떨어져 지냅니다. 7개월 전 죽은 아내 때문에 충격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딸을 이모 집에 맡긴 상태인데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제이크는 다시 케이티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려 합니다. 하지만 아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새로 출간한 소설은 내놓자마자 혹평이 자자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케이티의 이모 내외는 케이티를 아예 입양하겠다고 합니다. 이모 쪽은 제이크가 항우울제를 복용할 정도로 마음 상태도 좋지 않은데다 작품의 실패로 파산 위기까지 맞았으니 아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 양육권 소송까지 제기하는데요. 그때부터 제이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 케이티를 지키기 위해, 새 소설 집필에 더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딸을 위해서 매달린 작품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정작 케이티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제이크입니다. 함께 시간을 나누자는 어린 케이티에게 결국 그는 “내가 누구 때문에 일하는데!”라고 소리까지 지르게 되죠. 그렇게 둘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패이게 됩니다.


 

이 반목의 시간은 케이티가 회상하는 아빠와의 과거입니다. 영화는 현재, 사회복지 아동심리학자로 상담소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케이티가 아빠와 지냈던 과거의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전개되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의 심리 상담을 하는 케이티 자신에게서 정서적인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녀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서툴거든요. 어릴 적 아빠와의 관계에서 온 상처가 그녀의 현재까지 지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애정 백과사전에는 사랑, 결혼 같은 진지한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저 하룻밤을 즐기기 위한 '원나잇스탠드'가 전부인 거죠. 


하루는 그녀가 이런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자 심리상담사가 묻습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니?" 케이티는 이렇게 답하죠. “나를 만난 걸 후회하게 해주겠죠." 아무래도 타인에게 마음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단호한 대답인데요. 영화는 어른이 된 케이티가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과, 어릴 적 아빠와 지냈던 시간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줍니다. 


어릴 적 인생은 상처로 가득했지만 이후에는 그 흔적들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갔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른 케이티는 결국 팍팍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하나는 자원봉사에서 부모에게 버림받은 흑인 소녀를 전담하게 되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그녀에게 진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것인데요. 작가인 아빠의 팬이라며 그녀에게 다가온 작가 지망생 카메론(아론 폴)에게 한눈에 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련의 관계들이 그녀에게 의미하게 되는 바는 무엇일까요? 상담소에서 케이티는 입을 꾹 닫은 채 소통하지 않으려는 소녀를 세상과 이어주려 노력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그 소녀에게서 마음을 닫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사실은 큰 어려움 속에서도 어린 자신을 돌보았던 아빠의 마음이 되어 그 소녀의 처지를 헤아리게 되는 것이지요. 


연인 카메론과의 관계에도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빠의 소설 <파더 앤 도터>의 원본을 그에게 선물할 정도로 카메론을 많이 좋아하게 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깊은 관계로 발전하려 해도 그 이상 상대에게 다가서지를 못 합니다. 카메론이 케이티를 부모님에게 소개시켜주려고 하자 도망까지 치고 마는 모습은 그런 케이티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데요. 의아해하는 카메론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겠어. 누군가의 여자 친구가 되는 법을." 엄마의 죽음 이후 언제나 자신을 지켜 줄 거라고 했던 아빠와도 사이가 갈라진 이후 그녀는 인생 내내 깊은 관계를 맺으면 버림받을 수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주 ‘기본적인’ 틀의 이야기지만, <파더 앤 도터>는 마음을 깊숙이 움직이는 감동의 지점들 역시 아주 ‘기본적인’ 곳에 자리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큰 장점이 됩니다.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이 많은 재료를 동원하는 대신 기본적인 감정들만으로 구성해나간 아빠와 딸의 굴곡 어린 역사들이 진부함, 상투성이라는 함정에서 영화를 구제해, 관객에게 눈물과 감동을 주는 지점으로 안내하거든요. 


 

케이티가 현재의 고충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 속 오랜 시간에서 ‘현재의’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궁금증이 주는 증폭 효과도 꽤 큰데요. 과연 그때 두 부녀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모부 내외는 결국 케이티를 데리고 간 걸까. 아빠와의 갈등은 얼마나 더 깊어진 걸까. 이런 질문을 관객이 스스로 던지게 만듦으로써, 영화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재미까지 선사합니다. 


케이티는 자신의 관계들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과거 아빠와 행복했던 시절을 찾아내고, 아빠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를 마침내 깨닫게 되는데요. 그중 빠와 딸이 카펜터스의 팝송 <Close to you>를 함께 합창하는 장면은 제가 꼽는, 예쁘고 뭉클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두 배우의 호연도 인상적인데요. 액션영화 <글래디 에이터>의 영웅 막시무스 이미지가 유명한 배우 러셀 크로우가 아빠 제이크로 분하는데요. 강인한 체구, 강한 면모를 가진 러셀 크로우가 딸을 위해서는 최상의 것을 해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나약해지는 모습에서 그 슬픔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러셀 크로우는 최근 들어 직접 연출한 영화 <워터 디바이너>에서도 1차 세계대전에서 잃은 세 아들의 시신을 찾아 터키로 떠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그 반면 <퀸카로 살아남는 법> <맘마미아!>등을 통해 사랑스러운 청춘을 보여준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딸 케이티의 내적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이번 작품은 그녀 연기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기회기도 하지요.


부모님이 어릴 적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은 그 자녀가 어른이 되기 전에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항상 섭섭한 추억, 야단맞은 기억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언제나 그 뒤에서 든든하게 우리의 등 뒤를 지켜주었던 부모님의 따스함, 이 영화가 전해주는 새삼스러우면서도 공감 가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다른 글 더보기


 ▶[영화 속 보험이야기] 운명을 이긴 암 환자의 특별한 믿음 <애니를 위하여>  <바로가기>

 ▶[영화 속 보험이야기]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낳은 비극 <사도>  <바로가기>

 ▶갑작스러운 엄마와의 이별 이야기를 그린 <영화 속 보험이야기> 나의 어머니  <바로가기>





이화정